역사학자 이이화(불교신문 2010-12-13)   2010-12-13 (월)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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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이화

 
 
 
 
 
상대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삶의 역사’ 발굴
 
 
 
역사와 합리의 경합, 외골수 역사학자는 치열한 합리주의를 지향한다. 어차피 문헌과 유물에 근거하는 역사 연구의 다양성에서 최고의 합리주의를 향한 노력이 각별하다. 그렇지만 개인 연구자와 거대 학파와의 경쟁은 처음부터 객관성을 초월했다. 그래서 합리는 더 빛이 났다. 한국 역사학파의 거대 산맥 이병도에 맞서는 이이화(73) 개인의 역사바로잡기는 치열함을 넘어 초합리의 영역 개척이다. 홀로 역사 탐구에 나서서 ‘균형감’을 유독 강조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표절·대필은 식민사관 양산한 독버섯 같은 존재”
 
  단재상 수상, 〈한국사 이야기〉외 50여권 저술
 
  원효 화쟁사상 심취… 정화운동때 불교와 인연
 
 
 
답은 비판적 탐독이었다. 지독한 문헌 뒤지기에 비판정신으로 끝까지 살펴 정확성을 기하는 독해력은 그의 태생적 습성이었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한문 수학과 냉철한 비판 검토는 역사의 질곡에 맞서는 원천이었다. “원전을 끝까지 보라.” 그는 대학에서 표절에 대해 단호했다. 수강생에게서 표절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F학점을 줬다.

그가 원전을 보는 힘은 서자출신의 신분 한계에도 걸려있다. 보는 힘으로 신분차별을 넘어서고 인간의 본성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1977년부터 5년간 한문 원전 해제 작업을 했던 경험이 이를 가속화했다. “당시 교수들이 써놓은 해제가 일제 때 사전류 베낀 것 투성이다.”
 
전체 틀이 중요했던 학계의 풍조에서 표절은 절대가치에 빠지게 만들고 편견을 키웠다. 학계의 부패는 더 나쁜 대필로 이어졌다. 박사논문이나 저술,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이 식민사관의 뿌리를 키워온 온상이었다. “관료들의 부정과 아부보다 표절 대필이 더 바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위 관료들이 출세를 위해 남의 글을 베끼고 학위 논문을 대필하는 행태가 학문의 종속성을 넘어 시대 가치관의 종속성을 키워온 독버섯이라 봤다.
 
정신적 부패가 상속되는 구조, 영속화를 위해 파벌과 권력화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는 절대 장벽, 그 내면에 식민사관의 배양처가 있다. 그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50여권의 역사책 저술과 강의 강연 등이 무기였다. <한국사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 <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등은 합리적 균형에 접근하려는 노작이다.
22권의 대장정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집필했다. 책은 초고속으로 5000년의 우리 역사를 관통한다. 객관화를 위해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줄였을까? 마지막 22권에서 흔히 저자가 쓰는 ‘후기’조차 없다. 비판이 날이 섰을 때는 차갑다. 백성의 역사 의식에 한결 다가간다.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의 묵은 찌꺼기를 씻어내려는 사관(史觀)이 날카롭다.
2005년 장지연 파동도 그의 저서가 발단이었다. 그간 선구적인 애국계몽운동가와 언론인으로 추앙의 대상이었던 위암 장지연은 일제 치하에서 발표했던 ‘시일야방성대곡’ 100돌을 맞아 2005년 11월 독립기념관 기념비 건립까지 결정된 상태였다. 그 이전 그는 장지연이 <매일신보> 등에 친일논설을 썼던 사실을 밝혀내 저서에 기록했었다. 이것은 불씨였다. 신문사 주필이면서 일왕을 위한 축시를 쓰고 천장절에 신문을 휴간했다는 사실도 추가됐다. 그해 3월 논쟁은 언론을 달궜다. 국가보훈처와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가 곤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한일합방 이후 변절돼가는 위암의 모습에서 민족사의 비극을 본다. 역사바로잡기 차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그만큼 친일 논쟁에서 그의 등장은 필연이다. 그렇지만 그의 사관은 명확하다. “역사에 절대가치는 없다. 상대적으로 나쁜 점을 볼 뿐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서명했다. 친일행각에서 파괴력을 보여 온 탓인지 ‘빨갱이’ ‘좌파’란 공격이 닥쳤다. ‘왜 반대했나’란 질문에 “국가보안법은 인권유린법이라서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것이 북한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란 질의에서 응답은 “북한에 그에 상응되는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법부터 먼저 바꾸는 것이 옳다”로 간다. 친일행위 규명도 원리는 같다. “복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규명하자는 것이다.” 반성이 없으면 균형감을 찾기가 어렵다는 원리가 가동됐다.
그에게 ‘묵은 찌꺼기’와 ‘미래’ 어느 것이 더 소중하냐고 물었다. 그는 ‘미래’라는 화두에 낙점을 뒀다. 묵은 이념을 합리화하고 과대 긍정에 빠져서는 미래가 없다는 점이 출발점이다. 미래는 현재의 소외를 극복해야 열린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입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학으로 일궈내 사관은 어떤가. “민족의 힘이 돼왔던 민중의 움직임과 그들의 항거를 좀 더 정당한 기준에서 정리 발굴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역사를 민족-민중-생활사 등의 3각으로 조망한다. 서로 별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패쇄적인 민족주의 사관이 서구 제국주의 온상이었던 점, 인도주의적 관점을 중시하기에 민중사관이 필요하고,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어우러져 가는데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생활사가 필수적이다.
주역의 대가인 부친 밑에서 한학 훈육으로 다져진 그가 생활문화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유를 물었다. “지난날의 문화전통을 모두 계승해야 민족문화를 꽃피운다고 생각하는 고루한 관념도 버려야 한다. 묵은 것과 새 것, 고루한 것과 진취적인 것, 계승과 재창조를 가를 줄 아는 사관의 형성이 시급하다.”
 
그는 소설가 박완서 씨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규장각 시절부터 한문 원전 가르치기는 일상이었다. 1982년부터 거처였던 구리시의 ‘아치울 서당’에 <통감> <동사강목> <삼정책> 등 역사사료 원전을 가르쳤다. 강독과 더불어 경기도 일원의 실학파 유적을 답사했다. 이어 동학농민전쟁이나 삼남농민봉기 등지로 답사 범위를 넓혀갔다. 1998년 아치올에 한문을 배우러 오던 박완서 작가가 아예 이주해왔다. 이후 이곳은 ‘문화마을’이란 지칭이 붙었다. 자연 전통의 ‘두레 공동체’가 살아났다. 동네 주민들이 ‘아차올친목회’를 만들고 박완서 선생과 그가 공동회장이 됐다. 그리고 동네주민들과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찾아다녔다.
그는 1985년부터 50여회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의 단골강사였다. 기행은 봉건시대나 식민지시대 민중 저항의 유적지가 중심이었다. 평민으로 의병장이 많이 나온 영덕과 영해 일원의 신돌석과 호남의 들판, 영남의 산악지대, 여기에 지리산 일원을 빼놓을 수 없다.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 강의가 무궁무진한 만큼 인기였다.
“지리산 절은 보존된 것이 거의 없다. 저항세력이 절을 거점으로 삼았기에 관군이나 일본군이 절을 불 질렀다. 연곡사는 일만 나면 불속 연기로 사라졌다. 승려들도 저항세력에 끼어들거나 협조했기에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는 정화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 대전 신광사에 살았다. 신입 스님들에게 ‘교육’을 했다. 친일 불교의 실상과 한문 강독이 주였지만, 정치.경제와 사회실상도 그에게 들으려는 스님이 많았다. 공감대는 역시 ‘소외’였고 역사 비판의 힘이 여기에 가동됐다.
소외된 피압박 민족과 민중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는 방식이 내용 전달에 유용성을 키웠다. 그가 유불선을 관통하는 사상적 기반을 구축한 계기도 이뤄냈다.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화합 통합이 중시되면서 한국 역사에서 불교의 공헌을 다시 보게 됐다. 그래서 더욱 화려한 금(金)불사와 사찰건축에 부정적이다.
한국사 전시대에 역사인물 260여명을 선별 분석했다. 그중 종교인은 24명이다. “그 삶과 사상은 고통받는 민족과 민중 속에서, 순수하게 자기네가 믿는 종교에 빠지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끊임없는 정진으로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고, 무애행으로 수행의 근간을 삼은’ 원효스님, 그를 <진리는 다르지 않다>에서 “스승의 가르침보다 스스로 책을 읽고 사유하며 정진했다”라 평가하며 자신의 이상으로 그렸다. 그렇기에 역사인식은 훨씬 개방적이다. “고조된 남북 갈등도 민주주의 확대가 해소 방법이다. 독립적 역사학자의 재미있는 역사교육에서 불견법재(不法財) 즉, 타인에게 가르침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으면 생산력이 더 커짐을 본다. 
 
김종찬 기자  kimjc00@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이이화 씨는
 
2001년 15회 단재상(학술부문)과 2006년 임창순 학술상을 수상.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서원대 석좌교수, 역사문제연구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거쳐 경술국치 100주년 한일공동행동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았다. <한국사 이야기>(22권), <만화한국사>(10권), <허균의 생각> <한국의 파벌> <역사풍속기행> 등 50여권을 쓰면서 고난의 민족사, 백성들의 자취가 찾은 생활사, 압제에 눌렸던 민중사 복원에 앞서왔다.
 
 
[불교신문 2690호/ 12월15일자]
2010-12-13 오후 2:50:1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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