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신문 창간 50年 ‘50大 뉴스’ 1990년대
종단개혁 시작…불교사전 발간, 영상포교 박차
1993년 한국불교의 등불이었던 성철스님의 열반은 사회 안팎으로 회자되면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1994년 종단사태로, 조계종은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1994년 종단사태가 전화위복이 돼 민주적 종단운영이라는 결과를 낳으면서 불교 대중화 바람은 더 거세졌다. 이런 흐름 속에 불교TV 개국과 세계최대규모의 불교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 출간이 이뤄졌다.
제등행렬 경찰폭력사태
1991년 5월18일 오후8시, 경찰이 제등행진을 하고 있는 불자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불교계는 이를 5.18 제등행렬 경찰폭력사태로 규정하고 범종단적인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5월25일 당시 서울시 치안본부장 등 실무자 파면과 집권당인 노태우 정권의 공개사과를 촉구했다. 5월24일 제등행렬 최루탄 발포에 대한 서울시경국장의 사과가 있었으나 이튿날 불교탄압 규탄 범불교도대회가 조계사에서 열려 정권 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입장을 보였다. 불교신문은 1991년 5월29일 1면 머리기사에 ‘제등행렬 최루탄 발포 ‘제2법난’ 25일 불교탄압규탄대회’라는 제목으로 중점 보도했다.
해인사 방장 성철스님 열반
1993년 11월4일 오전7시30분 퇴옹당 성철대종사(1912~1994)가 해인총림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했다. 세수 82세, 법납 59세. 성철스님은 출가 후 10년 장좌불와와 산문불출 등 높은 수행과 함께 돈오돈수론을 주장, 교학발전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같은 해 11월10일 열린 영결식과 다비식에는 30만 인파가 해인사에 운집했으며, 12월22일 49재까지 장례기간 50만 명, 사리친견기간 120만 명 등 무려 200만 명의 인파가 합천 해인사에 운집했다. 불교신문은 1993년 11월4일부터 이듬해까지 특집기획기사를 통해 추모했다.
종단개혁 시초된 1994년 종단사태
1994년은 현대 조계종사에서 분수령이었다. 이전의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종단 운영과 관행에서 벗어나 민주적 종단운영제도로 쇄신한 시기였다. 1994년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은 정치권과 유착, 총무원장 3선 출마시도 등으로 분란을 일으켰다. 이를 막기 위해 1994년 3월23일 승가를 중심으로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가 출범했으며 3월29일, 4월10일 두 차례에 걸쳐 공권력 투입돼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4월13일 서의현 총무원장이 사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94년 종단사태’다. 당시 불교신문은 급기야 4월13일부터 20일까지 휴간을 결정, 1994년 4월27일자 1면에 휴간과 편파보도에 대한 사과문을 싣는 등 언론으로서 큰 시련을 맞았다.
불교TV 개국…영상포교 시작
1995년 3월1일 국내최초의 영상포교 채널 32, 불교텔레비전이 첫 전파를 발사함으로써 본격적인 영상포교시대를 열었다. 불교신문은 1995년 3월1일자 1면을 통해 “세계최초의 영상포교 채널 32, 불교텔레비전이 지난 1일 금호전기 빌딩 15층 행사장에서 개국 고불식을 갖고 본격적인 영상 포교시대를 선언했다”고 비중 있게 다뤘다. 이어 2면에는 당시 종정예하인 월하스님의 개국 법어를 실었고, 16면에는 개국 선언문과 프로그램 편성표, 제작현장 등 지면 대부분을 할애하며 비중 있게 다뤘다.
‘소쩍새마을’ 사이비승 파동
1995년 7월4일 MBC ‘PD수첩’에 방송된 자칭 일력스님의 소쩍새마을 사건은 불교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이후 중앙승가대는 소쩍새마을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해 8월4일 인수를 마무리했으나 이 과정에서 승가대 교직원들의 금품수수 등이 터져 말썽을 빚기도 했다. 불교신문은 1995년 7월11일 14면 ‘사이비승 폐해, 척결 부심’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소쩍새마을 사건에 대해 방송이 나가기 전부터 종단과 본사에 ‘어떻게 사이비승려를 지금까지 방치해 두었냐’, ‘창피해서 불자라고 말을 못하겠다’ 등 불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사이비승려 단속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여론이 높게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교도 사찰방화 훼불 잇따라
1996년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해 계획적인 사찰방화와 훼불사건이 잇달아 발생해 논란이 됐다. 본원정사 대웅전, 삼성암 종각, 화계사 대적광전, 망경사 대웅전 방화를 비롯 광신적 이교도의 훼불행위가 계속 일어났다. 불교신문은 1996년 4월30일자 15면 기사를 통해 방화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어 3면에는 ‘훼불사태 경계의 만전을’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화재보험가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어떠한 불교방해공작도 용납치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출범
1997년 3월15일 종단의 숙원이었던 조계종 중앙신도회가 조계사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전격 출범했다. 불교신문은 1997년 3월25일자 ‘중앙신도회 송재건 씨, 15일 창립총회 선출.회칙의결’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중앙신도회가 지난 15일 오후3시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 출범했다”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땅에 구현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세계인류평화에 기여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세계를 선도할 것을 다짐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송재건 초대회장의 인터뷰와 3면 사설과 ‘중앙신도회의 과제’라는 해설기사를 통해 기존의 소극적인 신도회 활동을 지적하고 앞으로 중앙신도회는 회원들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자주권 수호 ‘자연공원법’ 개정
1997년 11월17일 불교문화재보호법 개정에 따른 관람료 자율권 행사를 시작으로 총무원은 전통사찰의 수행환경과 문화보존을 강화했다. 또 자연공원법도 개정해 공원 내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자연 재산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아 전통사찰도 농지를 취득할 수 있게끔 농림부장관에게 시행규칙 개정 약속을 받았다. 불교신문은 1997년 11월25일자 1면을 통해 “불교자주권과 재산권의 행사를 가로막는 불교관계 3대 악법중의 하나인 자연공원법이 개정됐다고 보도했다.
1998년 종단사태 발발
1998년 총무원장 선거를 기점으로 또 한번의 시련을 겪는다. 총무원과 중앙종회 중심으로 한 종단과 정화개혁의 세력으로 양분된 불교계는 결국 공권력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1998년 12월23일 정부당국이 정화개혁회의 세력을 강제로 퇴거시키는 ‘98년 종단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불교신문은 1999년 1월1일자에 8, 9면 특집면을 통해 1998년 종단사태를 상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1999년 10월1일 법원이 당시 총무원장이던 고산스님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함에 따라 총무원장 선거를 다시 치르는 사태가 발생했다. 불교신문은 1999년 10월5일, 10월7일 1, 2, 3면에 걸쳐 보도하고 10월1일 법원 판결을 ‘헌법상 종교의 자유 무시한 오판’이라고 중점 보도했다.
불교사전 ‘가산불교대사림’ 출간
1999년 1월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이 <가산불교대사림> 1, 2권을 편찬해 화제가 됐다. 1982년부터 시작 17년 만에 첫 성과물을 낸 <가산불교대사림> 전 15권으로 일반불교술어, 세계불교술어, 한국불교술어 등 15만 여 항목으로 종합적으로 결집된 불교사전이다. 사전이 출간되자마자 불교학뿐만 아니라 한국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불교신문은 1999년 1월26일자 1면 ‘세계불교용어 사상최대 결집’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가산불교대사림>은 규모가 방대하고 세계불교대사전 가운데 표제어가 가장 많다”고 평가했다.
[불교신문 2670호/ 11월10일자]
2010-11-07 오전 12:25:4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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