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주도 올레길에서 기타를 메고 ‘섬집아기’를 부르는 이춘호 기자. 그가 부르는 동요는 ‘동심’의 또 다른 이름, ‘불심’을 깨우는 바람이다. |
제주도 올레길 나지막한 언덕. 무대는 초원, 조명은 햇살, 배경은 파란하늘이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단발의 곱슬머리, 한쪽 어깨에 달랑 멘 통기타,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단색의 머플러를 목에 두른 한 사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귀에 익숙한 동요의 가사와 멜로디이지만 결코 들어보지 않았던 평온한 편곡이다. 어느덧 눈을 감고 바닷가 어느 마을의 소년이 된 관객들. 그들의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촉촉이 젖은 눈가를 따라 세월의 흐름 속에 잊고만 지냈던 동심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영남일보 이춘호(51) 기자다. 그는 대구에서 ‘동요 부르는 기자’로 꽤 유명하다. 지난해에는 1집 음반 ‘바람난 동요’를 발매했다. 내년에는 창작곡도 준비 중이다. 영남일보에서는 맛집을 소개하는 음식전문기자로 활약 중이고 그 덕분에 방송까지 고정출연 하고 있다.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2천여 편의 작품을 쓴 시인이기도 하다.
즉석공연만 100여 회 이상
불교에는 수필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통도사 사보 「등불」(현「보궁」)에 이어 불교 월간지 「맑은소리 맑은나라」창간호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깨달음이 있는 수필’을 연재해 왔다. 원고지 20매를 빡빡하게 채우는 그의 글은 심금을 울리는 동요만큼 먹먹한 감동을 전한다. 작은 풀벌레가 노래하는 생명의 소중함, 가족의 가치, 소외된 이웃과 빛을 나눈 이야기, 진솔한 사랑의 소통, 연기(緣起)의 법문과 깨달음의 정진, 보살행의 단계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의 글에는 수행의 향기가 흠뻑 젖어 있었다.
“한 땐 출가를 하고 싶었어요. 군에서 책을 볼 기회가 많았거든요. 주로 헤르만 헤세, 칸트, 데카르트 등 사상가들의 글을 읽었고 자연스럽게 『반야심경』, 『능엄경』 등의 경전과 ‘유식’ 관련 책으로 이어졌죠. 불교가 삶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결심을 하고 제대 후 무작정 부산의 한 암자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행자실에서 며칠을 지낸 어느 날 저보고 속세에 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어쩌겠어요. 그 길로 하산을 한 거죠.”
출가의 포기는 진리를 향한 열망을 일상에서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아직 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전문대에서 공업경영을 전공했고 다시 대학의 기계과를 거쳤지만 제대 후에는 정치 외교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양대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10년 동안 학위만 10개에 달하는 만학도의 삶을 보냈다. 오히려 당시 그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수많은 무전여행 그리고 그 길의 도반이 된 기타와 책이었다. 20대 후반까지 읽은 책이 4500권에 달했다고 하니 그의 독서량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독서의 끝에는 항상 글을 썼다. 시, 수필, 소설 등 써내려간 헤아릴 수 없는 습작들은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기타 역시 그의 삶에 평온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이정표로 거듭났다. 바로 ‘동요 가수’의 길이었다.
 |
| 올해 초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최한 신춘 동요 콘서트의 한 장면. |
“제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마침 IMF 시절이었는데 노래로 시대적 아픔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과 돌멩이 대신 기타를 들었던 게 떠올랐거든요. 오전 근무가 끝나면 물통 하나와 기타를 메고 산에 가서 발성 연습을 했어요. 연습곡은 늘 입에서 맴돌던 ‘섬집아기’였고요. 그렇게 3년이 지난 2000년 제1회 비쓸락(비오는 날 쓸쓸한 사람들을 위한 樂) 게릴라 콘서트의 첫 무대를 장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늘 연습하던 ‘섬집아기’를 불렀죠. 동요를 부른 건 그 때부터입니다.”
그의 동요는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바쁜 삶 속에서 잊고 있던 순수함으로 방향을 돌리는 나침반이 되어 준 것이다. 그는 어른들을 위한 동요 전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비를 털어 이동식 앰프와 음향시설을 구비해 그의 애마인 빨간색 마티즈에 실었다. 비쓸락 콘서트를 비롯해 대구 도심의 수성공원에서 늦은 밤 거리공연을 갖는 등 지금까지 전국에서 100여 회 이상 즉석 공연을 해왔다. 부른 동요만도 150여 곡에 이른다. 지난 5월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제주도 올레길에서 출발한 ‘동요 끈 잇기 국토대장정’이다. 2년 동안 3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폐교가 된 초등학교, 노숙자, 독거노인, 공단 등을 찾아가 동요를 부를 예정이다.
청년시절부터 수행…출가 결심도
그런 그의 여정에는 고마운 인연을 위한 찬가도 포함된다. 11월 19일 오후 6시 30분 부산 영광도서 문화사랑방에서 자신이 11년 동안 수필을 쓴 잡지 「맑은소리 맑은나라」의 11주년을 축하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요 콘서트’ 역시 그 일환이다. 그는 “그저 매달 삶을 점검한다는 심정으로 그 달의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글로 쓰고 있다”며 “청년 시절 습작의 열정을 떠올리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라며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회향했다. 그가 먼저 원고료를 거부해 받지 않으면서도 이 연재를 위해 타 매체의 기고 요청은 일체 마다했다고.
사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청년 시절부터 염불, 진언, 위빠사나 등 수행의 연속이었다. 최근에는 108배를 하고 있단다. “머리를 낮춰서 밤새 굳어져 있는 관절을 풀어 모든 사고의 첫 출발로 돌아가면 마음이 착해진다는 걸 느낀다”는 그의 말에 수행에 대한 진솔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수행만이 아니다. 그는 수입의 20%를 보시로 회향하고 있다. 그것도 기록이 남는 특정 단체로의 정기적인 후원보다는 갑자기 어려움에 처한 후배의 살림을 돕고 취재 중 인연이 닿는 어려운 이들을 감싸 안는 무주상 보시가 대부분이다. 그는 “나누면 윤택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언한다. “상품처럼 값이 매겨지는 삶이 아니라 작품처럼 자유롭고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말이다.
“요즘 동요를 부르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동요를 가만히 부르고 있노라면 부르는 저도 듣는 사람들도 평온함을 공유합니다. 불심의 본질도 이처럼 작은 일상에서 발견된다고 봐요.”
그가 부르는 동요는 ‘동심’의 또 다른 이름, ‘불심’을 깨우는 바람이었다. 그는 민들레처럼 외롭지 않다. 어디에나 날아가 동심의 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대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072호 [2010년 11월 15일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