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사회] 내포 가야사의 폐사가 주는 교훈- 옥천암 월보 07년 07월

수보리 2008-10-24 (금) 07:37 17년전 5115  

 김동인 소설 “운현궁의 봄”을 고등학교 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작품은 대원군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조선말의 복잡한 내외 정세를 그렸던 역사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반부에서 그는 김좌근 일파의 세도 밑에서 수모를 당하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한편, 조대비(신정왕후, 헌종의 母)와 은밀히 접촉하여 철종 승하 후 아들을 등극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권좌에 오른 뒤에는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과단성 있게 비리를 척결해간다는 이야기가 중심이었습니다.
 때를 기다리기 위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인내를 하였던 대목은 지금까지도 제게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이란 정치가를 다시 보게 되어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뀐 지금 불교적인 관점에서 흥선대원군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이곳 내포 가야산에서 백제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활동하다 보니 보원사와 가야사라는 옛 절터가 천년의 숨은 역사를 가지고 제 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보원사는 많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 가야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伽耶山) 옥양봉 남쪽 기슭에 위치한 가야사는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전하지 않으나 한때는 수덕사(修德寺)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보원사가 1천여명의 스님들이 계셨다면 가야사는 3천여명의 스님들이 주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1177년(명종 7) 3월에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천민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켜 이 절과 황리현(黃驪縣: 지금의 여주)·진주(鎭州: 지금의 진천) 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고 또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산 최고의 명당으로 2대에 걸쳐 왕손이 나온다는 풍수 이야기에 1844년(헌종 10) 절을 불사르고 자신의 부친 이구(李球: 1788∼1836)의 묘를 쓴 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남연군(南延君) 묘이고 마침내 1863년 자신의 아들이 보위에 오르니 바로 고종(高宗)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운 죄책감에 가야산 동쪽에 절을 짓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된 미륵석불이 있는데 이 미륵불상은 계곡 아래쪽을 향하지 않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절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돌아앉았다고도 하고, 본래 북쪽 계곡에서 들어오는 병마(兵馬)를 물리치려는 뜻에서 북쪽을 향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고종과 순종을 왕으로 만들어서 풍수의 이야기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왕을 끝으로 조선왕조가 몰락한 것을 보면 어느 것이든 인과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재 불교가 처한 상황이 그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출세간이라 하여 세상과 동떨어진 별천지를 만들어 ‘그들만의 리그’를 벌일 것이 아닙니다. 체계적인 교육과 포교를 병행하여 세간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친근한 불교’로 거듭 나지 않으면 가야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 하겠습니까?

(주지 정범스님)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